Narrative Report 인생 막장서 길어올린… ‘맛있는 성공스토리’ 들어보실라우?

마지막 업데이트: 2022년 1월 11일 | 0개 댓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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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 번의 사업 실패를 딛고 오뚝이처럼 일어나 연매출 35억 원에 이르는 샌드위치 업체 ‘에스엘비코리아’의 사장으로 재기한 정주백 씨(53)가 서울 서초구 서초동에 낸 샌드위치 카페 ‘멜랑제’ 앞에서 자신의 작품들을 들어 보이고 있다. 홍진환 기자 [email protecte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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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arrative Report]인생 막장서 길어올린… ‘맛있는 성공스토리’ 들어보실라우?

네 번의 사업 실패를 딛고 오뚝이처럼 일어나 연매출 35억 원에 이르는 샌드위치 업체 ‘에스엘비코리아’의 사장으로 재기한 정주백 씨(53)가 서울 서초구 서초동에 낸 샌드위치 카페 ‘멜랑제’ 앞에서 자신의 작품들을 들어 보이고 있다. 홍진환 기자 [email protected]

《 화장품 회사 영업사원 그만두고 룸살롱 과일 납품 사업 시작. 보기 좋게 실패. 이번엔 신혼집 팔아 4평짜리 미니슈퍼 열었지만 또 실패. “인생에 미래가 안 보여.” 네 살, 한 살짜리 두 아들을 남기고 아내가 떠났다. 밤새워 김밥 말아 대학 매점에 납품해봤지만 역시 실패. 은행대출에 사채까지 끌어와 빵집 냈지만 실패. 한강 다리에 Narrative Report 인생 막장서 길어올린… ‘맛있는 성공스토리’ 들어보실라우? 섰다. 희한하게 오기가 생겼다. “죽을 때 죽더라도 비싼 것 좀 팔아보고 죽자.” 서울시내 빵집 200군데를 돌아다니며 샌드위치의 맛을 봤다. 그렇게 ‘프리미엄 샌드위치’에 도전했다. 점점 판매량이 늘더니 100개가 1000개 되고, 1만 개가 됐다. 》
# 프롤로그-1989년 서울의 한 룸살롱

“정 대리, 술잔 비었잖아. 거 참….”

“아유, 죄송합니다. 제가 이렇게 눈치가 없다니까요.”

서른한 살의 잘나가는 화장품 회사 영업사원이던 나는 그날도 거래처 직원 접대하느라 바빴다. “부장님, 안주 드셔야죠.” 이쑤시개로 수박을 콕 찍어 턱 아래에 갖다 바쳤다. 적절한 타이밍에 술 따라가며 허세에 맞장구치며 비위 맞추는 건 매일 겪어도 고역이었다.

‘에이 더럽다. 차라리 저 수박 파는 일이 백배는 편하겠네.’

나 정주백이 누군데. 월 매출 300만 원으로 꼴찌를 도맡았던 용산 대리점을 반년 만에 월 매출 1억3000만 원으로 끌어올린 ‘전설’ 아닌가. 한 달도 안 돼 밑창이 닳아빠진 구두를 버려가며 일한 끝에 사장 표창도 받고, 3000만 원짜리 단독주택 신혼집도 마련한 나다. 언제까지 이놈의 ‘을(乙)’ 생활을 계속해야 하나.

“손님, 내리셔야죠.” 택시 운전사가 흔들어 깨웠다. 애써 정신을 차리며 비틀비틀 걸었다. 집에 다다를 무렵 회사생활에 대한 회의는 결심으로 변했다. ‘내 사업을 일구자. 이 실력으로 뭘 하든 절대 굶지 않는다.’ 다음 날 만류하는 상사와 동료들을 뿌리치고 사표를 냈다.

#1. 2005년 봄, 서울 강남

“조선호텔입니다. 저희 상무님이 좀 만났으면 하시는데요.” 뚝. 걸려온 전화를 그냥 끊어버렸다. 벌써 세 번째다. 두려웠다.

왕년의 패기 넘치던 정주백은 사라졌다. 머리는 희끗거리고 손등이 터서 갈라진, 삶에 찌든 중년 남성이 있을 뿐이었다. ‘내 노하우를 빼앗아가려는 거겠지.’ 불안한 마음에 잠을 잘 수 없었다.

사흘 뒤 같은 전화가 또 걸려 왔다. “제발 끊지 마세요.” 아무 말 없이 수화기를 들고 있었다. “정 사장님 때문에 저희가 혼났습니다. 상무님이 정 사장님 샌드위치를 드시고 ‘너희들은 왜 이것처럼 못 만드느냐’고 호통을 치셨습니다. 시간 좀 내주세요.”

낡은 차에 샌드위치 5개를 싣고 약속장소로 갔다. 말끔하게 차려입은 신사 네 명이 90도로 고개를 숙여 맞았다. 살면서 이렇게 정중한 대접은 처음이었다. 내가 가져간 참치 샌드위치, 베이컨 샌드위치가 고급 접시에 가지런히 놓였다.

“샌드위치는 이게 진짜야. 우리 것은 아니야.” 조선호텔 상무가 한 입 베어 물고는 흡족한 표정으로 계약서를 내밀었다. 볼펜 잡은 게 하도 오랜만이라 글씨가 서툴렀다. 집으로 오는 차 안에서 눈물이 터져 나왔다. 사표를 던진 그해가 떠올랐다.

#2. 다시 1989년 겨울

“원래 거래하던 사람이 얼마에 물건 댔어요? 에이, 내가 더 빼줄게.” 사표를 쓴 다음 날, 바로 룸살롱과 카바레를 상대로 과일장사를 시작했다. 퇴직금 1000만 원으로 중고 1t 트럭을 장만해 서울 가락시장에서 수박 50통, 복숭아와 딸기 10박스를 샀다. 룸살롱을 찾아갔다. 그동안 쌓은 영업 실력을 한껏 살려 룸살롱 ‘상무’들을 대하니 일이 곧잘 풀렸다. 직장생활을 하면서 모은 돈에 집 담보대출을 받아 사업을 키웠다. 룸살롱 7곳에 월 900만 원어치씩 과일을 납품하기로 했다.

드디어 한 달 뒤, 수금하러 갔다. “정주백입니다. 김 상무님을 뵈러 왔는데.”

“정주백? 우리 상무님은 그런 사람 모른다는데?”

“에이 장난도 참. 저 섭섭해요 진짜.”

“전에 있던 사람들 이제 없어. 주인이 바뀌었대도!” 어처구니없었다. 순식간에 세 업소에서 3000만 원을 떼였다. 사표 내는 걸 만류하던 전 동료들의 목소리가 귓가에 윙윙거렸다.

신혼집을 팔던 날 아내는 말이 없었다. 반지하 방으로 집을 옮기고 4평짜리 미니슈퍼를 열었다. 네 살, 한 살인 두 아들을 근근이 키우던 어느 날, 아내가 “이야기 좀 하자”고 했다. “인생에 미래가 안 보여.” 이혼 요구였다. 졸지에 아들 둘을 떠안은 이혼남이 됐다.

어린 애들을 돌봐야 하는데 하루 종일 슈퍼를 지키고 앉아 있을 순 없었다. 김밥을 말아 대학 식당이나 매점에 납품하면 어떨까. 슈퍼마켓을 정리한 돈으로 시금치, 우엉, 쌀을 샀다. 밤새워 김밥 300줄을 말아 무작정 서울의 한 대학에 갔다.

“이 김밥은 우엉도 없는데 왜 다른 것보다 200원이나 비싸죠?” 우물쭈물하다 김밥을 그대로 들고 매점을 나왔다.

햇살 좋은 대학 캠퍼스를 스무 바퀴 돌았다. 주머니에 남은 돈을 털어 우엉을 사 들고 집으로 왔다. 아들들은 새까만 손을 씻지도 않고 자고 있었다. ‘우엉을 넣어라.’ ‘맛살을 더 넣어라.’ 대학 측의 요구에 맞추다 보니 김밥 한 줄 팔아 남는 돈은 딱 70원에 불과했다. 그나마 가격 경쟁에 밀려 접고 말았다.

곤궁한 삶의 연속이었다. 하루 종일 목걸이 1000개를 납땜해도 입에 풀칠하기 힘들었다. 딱 한 줌 얻은 쌀을 금싸라기라도 되는 양 소중히 씻어 밥을 지었다. 아들 밥숟가락에 김치 한 조각을 올려줬다. 할 수 있는 유일한 아버지 노릇이었다.

그날 오후였다. “담임입니다. 학교로 오셔야겠어요.” 아들이 담임선생님의 지갑에서 돈을 훔쳤다고 했다. 선생님이 보는 앞에서 아들의 뺨을 때리고 발로 짓밟으며 사정없이 때렸다. 아들의 상처에 약을 발라주는데 ‘가슴이 찢어진다’는 말이 어떤 건지 알 것 같았다. 자식들을 봐서라도 한 번 더 일어서야 했다.

중고 오븐과 믹서 한 대를 구해 빵을 만들었다. 다시 그 대학을 찾아갔다. 다행히 조금씩 팔려나갔다. 1996년 어느 날. 평소 우리 부자(父子)를 눈여겨본 동네 상가 주인이 “싼값에 1층 가게를 내줄 테니 빵집을 해보라”고 제안했다. 수백 번도 더 허리를 숙였다.

은행 대출에 사채까지 끌어와 마련한 1억 원으로 인테리어도 하고 제빵 기기도 들여놨다. 직원도 2명 뽑았다. 장사는 잘됐다. ‘이런 게 사는 거구나’ 하는 생각에 행복했다. 딱 1년 2개월 동안은.

외환위기가 찾아왔다. “우리도 사정이 어려워서 그래. 가게 좀 빼줘요.” 그렇게 하루아침에 쫓겨났다. 대출 받은 원금과 이자, 외상으로 산 자재 대금, 직원 인건비에 퇴직금도 챙겨줘야 했지만 방법이 없었다.

빚 독촉은 질겼다. 창밖에서 발자국 소리만 나도 불을 끄고 아들 둘을 끌어안은 채 숨죽였다. 하루에도 열두 번 ‘죽어야지’ 생각하다가도 아이들의 자는 모습을 보면 차마 그럴 수가 없었다.

#4. 2002년 겨울

희한하게도 삶의 끝에 서니 오기가 생겼다. ‘갈 곳 없는 인생 막장, 죽을 때 죽더라도 비싼 것 좀 팔아보고 죽자.’ 빵가게 할 때 쓰던 기계를 활용해 ‘프리미엄 샌드위치’를 만들어 팔아보기로 했다. 제일 궁핍하던 시기에 프리미엄 전략이 떠올랐으니 아이러니했다.

서울시내 빵집 200군데를 돌아다니며 샌드위치를 맛봤다. 그러기를 석 달, 샌드위치가 입에서 살살 녹는 듯 기가 막힌 빵집을 찾았다. 가게 주인을 사흘 내내 조른 끝에 ‘윤 할아버지’라는 70대 노인의 주소를 받았다. 한때 큰 빵집을 운영했다던 노부부에게서 샌드위치의 모든 것을 전수받았다. 교육비는 한 달 뒤에 주겠노라고 거짓말했다.

한 달이 지났다. “돈은 준비됐는감?” 노부부가 물었다. 시장 국밥집으로 노부부를 모셔 식사를 대접하며 사실대로 털어놨다. “죄송합니다. 석 달 후에 드릴 테니….” 한겨울, 착잡한 표정으로 돌아선 노인들의 뒷모습이 보이지 않을 때까지 얼음 바닥에 무릎을 꿇었다.

그렇게 배운 샌드위치를 다시 대학에 가져갔다. 당시 구내식당 밥값은 1400원. 샌드위치는 2500원이었다. 김밥 납품 때 연을 맺은 대학 구매담당자는 “또 망하려고 작정했나?”라고 핀잔을 줬다. 판매대에 30개만 올려달라고 사정했다. “자네도 자식새끼 먹여 살려야 할 것 아닌가. 딱해서 올려두기는 하겠네만….” 그는 혀를 끌끌 찼다.

다음 날 전화가 왔다. “저… 미안한데 샌드위치 없어서 못 팔아. 100개만 해서 얼른 갖다 줘.”

점점 판매량이 늘어 100개가 1000개가 되고, 1만 개가 됐다. 지금은 신라호텔 ‘아티제’를 비롯해 대기업 구내식당, 대형 로펌 등에 ‘정주백표 샌드위치’를 납품하는 에스엘비코리아의 대표이사가 됐다. 연 매출 35억 원에 직원만 30명이다. 금융채무 불이행자(옛 신용불량자)가 된 지 10년 만에 빚도 다 갚았다.

# 에필로그

나는 제2의 도전을 하고 있다. 늘 납품만 하다 보니 내가 만든 샌드위치를 맛보는 사람들의 표정이 궁금했다. 올해 8월 6억5000만 원을 들여 서울 강남에 샌드위치 카페를 열었다. 예금과 적금을 몽땅 깨 전부 현금으로 가게를 차렸다.

나는 빚이 한 푼도 없다. ‘본의 아니게’ 그런 것이다. 사업을 하려면 자금이 넉넉해야 한다. 올여름 대출을 받으러 신용보증회사들을 찾아갔다. 빚 다 갚고 금융채무 불이행자 딱지를 뗀 지 벌써 4년이 지났으니 이젠 되겠지 싶었다. 하지만 금융채무 불이행자 기록은 좀처럼 지워지지 않았다.

‘난 여전히 신용등급 8등급, 실패의 연속을 살고 있는 것 아닌가…’ 하는 회의도 들었지만 이내 추슬렀다. 요즘엔 서울시 창업스쿨에 강연도 나간다. 실패를 맛본 이들에게 조금이라도 도움을 주려고.

강연할 때마다 장석주 시인의 ‘대추 한 알’이라는 시를 먼저 읊어준다. ‘저게 저절로 붉어질 리는 없다/저 안에 태풍 몇 개/저 안에 천둥 몇 개/저 안에 벼락 몇 개/저게 저 혼자 둥글어질 리는 Narrative Report 인생 막장서 길어올린… ‘맛있는 성공스토리’ 들어보실라우? 없다/저 안에 무서리 내리는 몇 밤/저 안에 땡볕 두어 달/저 안에 초승달 몇 낱’

태풍과 천둥을 끌어안고 지내온 처절한 실패담이 세상에 알려지는 게 부끄럽기도 하다. 하지만 창업에 실패해 좌절하고 스러져 있는 누군가가, 실패할 것이 두려워 도전하지 않는 젊은이들이 내 모습을 보고 부디 힘을 낼 수 있다면, 그것 하나면 됐다.

성공스토리

“유럽인들이 아시아 식품을 찾는 이유는 다양성과 건강성, 편의성, 조리성 때문입니다. 매운 음식을 못먹는 프랑스 사람들이 불닭볶음면에 열광하고, 전에는 이름조차 없었던 한국의 교자만두가 최근 불티나게 팔리고 있는 것이 바로 그것을 입증합니다.”

지난 9일 ‘미주․유럽시장 수출확대 전략회의’에서 국내 식품회사로는 유일하게 프랑스 리테일 공략에 성공한 ‘메종드꼬레(Maison de Coree: 한국의집)’의 마케팅 전략을 소개한 김직 이사의 말이다.

메종드꼬레는 그동안 프랑스에서 찾아볼 수 없었던 ‘교자만두’를 처음으로 소개하고, 이의 성공을 발판으로 매운맛에 질색인 현지인들에게 컵용기의 라면과 우동을 선보였는가 하면 스낵칩과 알로에베라 음료에 이어 각종 특용작물성분을 이용한 마스크팩 제품 등 이제는 식품에서 화장품 . 영역으로까지 제품 라인을 확장해나가고 있다.

‘서울에서 파리로’라는 컨셉의 메종드꼬레는 만두전문업체인 GMF가 운영하는 프랑스 브랜드다. 메종드꼬레가 우리나라 식품의 불모지 프랑스 유통매장에서 날개를 펼치기까지 시장 개척 및 성장 스토리를 김직 이사를 통해 들어본다.

GMF의 김직 이사가 한국식품의 불모지 프랑스에서 '메종드꼬레' 브랜드로 좌충우돌하며 성공한 귀한 경험을 공유하며 비법 전략을 공유하고 있다.

■ 2020년 메종드꼬레는 무엇을 할 것인가

프랑스인 1500명을 대상으로 브랜드 인지도 조사를 실시한 결과 40%가 “아시아 식품을 한 번도 경험하지 않았다”고 응답했다. 매우 충격적이면서도 흥미로운 내용이었다.

프랑스 인구는 우리나라와 비슷한 5000만 명으로, 그 중 절반 가까이가 아시아 식품을 경험하지 못했다는 것이다. 그런데 이들 아시아식품을 접하지 못한 사람 중 60%는 ‘경험하고 싶은 의향이 있다’고 답했다. 하지만, 대다수가 어디서 사고, 어떻게 먹는지 모른다는 반응을 보임으로써 메종드꼬레는 또 다시 도전하게 된다.

여기서 메종드꼬레의 예상이 빗나간 것은 한국을 포함한 아시아식품을 경험하고 싶어하는 소비층이 여성 뿐 아니라 남성들도 많다는 점이었다.

유럽인들이 열광하는 K-POP 스타 중에는 남성들이 많기 때문에 프랑스 여성들이 한국 문화를 더 좋아할 것으로 생각했지만, 거의 동등한 비율을 보였다. 프랑스 전국을 대상으로 어플리케이션을 활용해 설문 조사한 결과 응답자의 12%가 ‘메종드 꼬레를 안다’고 답했다. 10명 중 1명은 메종드꼬레를 알고 있는 셈이어서 적잖이 놀랐다. 그만큼 회사의 가치가 올라가고 있다는 것을 입증해주었다.

그 중 메종드꼬레 브랜드가 ‘매력적이다’고 생각한다는 응답률이 39%였고, 50%는 ‘나쁘지않다’는 반응을 보여 89%라는 긍정적인 데이터를 얻을 수 있었다.

■ 왜 ‘메종드꼬레’, 왜 아시아 브랜드를 좋아하나?

aT가 여러 차례 실시한 시장조사와 정확히 일치하는 조사결과다.

그 첫 번 째 이유는 다양성이다. 즉 새로운 맛과 경험을 원하고 있다. 라면 중에서도 다양한 맛을 즐기기를 원한다. 일례로, ‘까르보나라 라면’이 있는데 프랑스사람들은 아시아에서는 까르보나라 맛을 낼 수 없다는 편견을 갖고 있어서 이것을 깨기 위해 도전해서 만든 제품이다.

불닭제품도 있다. 삼양식품과 똑같은 레시피로 만들었다. 당초 삼양식품 측에서는 이 제품을 PB 브랜드로 허락하면서도 전 세계에서 매운 맛을 가장 못먹기로 유명한 프랑스이기에 잘 팔리지 않을 것으로 예상했지만 빗나갔다.

현재 데이터는 셀럽 리스트 2위로 편견을 깨는 것이다. 우리 스스로도 편견을 깨야하고, 까르보나라를 받아들이지 못했던 소비자들의 인식을 깨야 되고, 여러 가지 다양성을 원하는 소비자의 니즈를 한국식품이 풀어줘야 한다는 의무감 같은 것이 생겼다.

두 번째는 건강이다. 외국에서, 특히 프랑스에서 봤을 때 우리 음식은 건강하다는 인식이 팽배하다. 한국인들은 날씬하고 오래 산다고 생각하고 있다.

30대 초중반 소비자들로부터 ‘메종드꼬레 라면이 건강하냐’는 질문을 많이 받았다. 심지어 까르푸의 한 중역은 “프랑스인들은 한국식품을 통해 건강이란 컨셉을 보고 싶어하는데, 라면 제품을 개발하면서 ‘건강’을 놓쳤기 때문에 national 매대에 넣지 못한다”며 다시 만들 것을 요구하기도 했다.

메종드꼬레는 라면으로 ‘건강’을 강조하는 문제를 놓고 많이 고민했다. 요즘 한국에서 인기를 끌고 있는 건면도 검토해 보았고, 과연 건면을 사용하면 건강해질까도 생각해보았다. 그만큼 프랑스 소비자들의 26%는 한국식품을 포함한 아시아식품을 통해서 건강을 얻기를 원한다.

세번째는 환경에의 기여를 원한다. 재활용이나 플라스틱 등을 어떻게 해석해야 할지 잘 모르겠다. 원재료로 접근해야할 지, 패키징으로 접근해야할 지 어려운 숙제이다.

[리셋 차이니즘]⑧"작은 성공스토리 만들어라"

최용민 무혁협회 동향분석실장 인터뷰
"제조업에서 서비스로 눈 돌려야"
"사드 비상시기 첫단계 가동필요"

"작은 도시부터 성공스토리를 만들고, 똘똘한 현지 파트너를 구하라"

한국무역협회 베이징지부장에서 갓 복귀한 최용민 동향분석실장의 조언이다. 그는 이달 23일 열리는 '2017 차이나워치 포럼'(비즈니스워치 주최)에서 '중국내 한국기업 위상과 생존방안'에 대해 강연한다. 비즈니스워치는 포럼을 앞두고 최 실장을 인터뷰했다. 최 실장은 사드(THAAD·고고도 미사일 방어체계)에 따른 중국의 제재 조치에 대해 "일희일비 하지 말고, 원칙을 지켜라"고 강조했다.

-한국의 중국에 대한 해외직접투자(FDI)는 매년 늘고 있지만, 중국에 대한 한국의 수출 비중은 제자리걸음이다. 현주소는?

▲한국은 지난해 중국에 약 50억달러(약 5조7000억원)를 투자했는데, 수출유발형 투자다. 투자가 늘수록 수출도 늘어야 하지만, 점차 둘의 연관관계가 줄고 있다. 중국 경기가 둔화되고, 중국내 기술이 발전하면서다. 국내 부품소재분야의 차별화와 고급화가 필요하다. 한국이 그간 중국을 인건비가 싼 가공무역만으로 활용하는 동안, 중국의 내수 시장을 놓친 면도 반성해야 한다.

-중국의 산업지도가 제조업에서 서비스업으로 바뀌고 있다. 변화 속에 어떤 기회가 있나?

▲중국 GDP(국내총생산)에서 서비스가 차지하는 비중이 50%가 넘었다. 선진국은 80%가 서비스업이다. 중국도 산업구조가 변할 것이다. 그런데 우리의 중국 투자는 80%가 제조업에 몰려있다. 눈을 제조업에서 서비스로 돌려야 한다. 환경과 의료, 노인, 어린이 등과 관련된 서비스 업종에 주목해야 한다.

-국내 기업들이 보통 베이징이나 상하이 등 대도시부터 진출한다. 하지만 글로벌 기업들과 경쟁 등에서 밀리는 경우가 많은데, 대비책은 없나?

▲중국에는 660여개의 도시가 있다. 각 도시엔 몇 백 만 명이 살고 있다. 베이징이나 성(省) 단위부터 공략하는 것은 한국 스타일이다. 베이징과 상하이 등에서 중소기업이 살아남기는 힘들다. 일부 국내 중소 화장품회사는 중국의 2~3선 도시의 대학가 앞을 공략하고 있다. 중소도시라도 소홀히 하지만, 소비력은 충분하다.

아울러 중국에선 똘똘한 파트너가 필요하다. 과거엔 의사결정이 늦어지고, 파트너에 끌려다닐까 걱정돼 단독 진출했다. 하지만 지금은 중국 시장이 워낙 빨리 변하고, 리스크도 커지고 있다. 윈윈할 수 있는 파트너를 구해 화학적 결합을 이끌어내야 한다.

-사드로 한중 관계가 얼어붙고 있다. 일각에선 사드가 배치되면 한한령이 더욱 심해질 수 있다는 우려도 나온다.

▲기업 입장에서 두 가지 대응책이 필요하다. 하나는 중국 규정과 절차를 잘 지켜야 한다. 규정이 어느 때는 엄격하고 어느 때는 느슨하기도 하지만, 규정 어기고 나서는 억울하다할 수 없다.

두 번째는 개발단계부터 중국 시장에 맞는 제품을 만들어야 한다는 점이다. 한국에서 잘 팔리는데 중국에서 왜 이런 문제가 생기느냐고 따지기 전에, 중국 실정에 맞는 제품을 만들어야 한다. 일부 한국 화장품 기업이 중국 법령을 위반한 것은 팩트다. 사드 변수와 상관없이, 규정은 언제든 지켜야 한다. 한한령에 일희일비하지 말고, 원칙을 지켜라.

▲중국에 진출한 한국 기업은 비상시기 첫 단계를 가동해야 한다. 원자재 보유량을 늘리고, 물류를 여유있게 운영해야 한다. (한한령이 더 거세지면) 신제품 출시를 자제하고 기존 제품 위주로 가야한다. 인증과 마케팅에 시간이 오래 걸리는 신제품 출시는 최소화하는 수출 전략을 짜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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